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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저자: 김용규)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고등학교 때였다. 당시 독서퀴즈 대비용으로 학교에서 지정해줬는데, 타의로 읽은 것이다 보니 책을 즐기기보다 공부하듯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회사 연수 교육 중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다시금 이 책이 생각나 읽어보게 되었다. 10년 전 처음 읽었을 때와 다르게 재미있게 읽었고 의미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는 문학을 철학이라는 창을 통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명작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동시에 여러 철학 개념들을 접할 수 있었다. 문학은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인간사를 그리고 있다. 가상의 이야기지만 인간 사회를 담고 있는 문학을 철학을 통해 풀어내면서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깊게 해준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에서는 여러 가지 문학 작품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데미안을 다룬 부분과 구토를 다룬 챕터였다.

 

데미안에는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아브락사스는 빛과 어둠 두 세계 모두를 지배하는 신이다.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항상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해왔는데, 때문에 빛의 세계에 속했을 때는 항상 어둠의 세계를 갈망하고 어둠에 세계에 속했을 때는 빛의 세계를 갈망해왔다. 이에 대하여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편협한 반쪽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충만한 세계, 즉 아브락사스에게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달리 이는 말하면 이성(빛의 세계)와 감성(어둠의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갖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이 부분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시된 중용의 필요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숙함이란 본능과 정신, 쾌락과 고통, 자유와 책임 그리고 안전과 모험을 동시에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 즉 중용을 추구할 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토에서 사르트르는 그의 실존주의 철학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구토의 등장인물인 독서광을 통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닌 아는 행위한다 고로 존해한다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명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토에서 독서광이라는 캐릭터는 매우 흥미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유명한 학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수첩에 적어놓는다. '독서광'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보다는 타인의 지식에 더 신빙성을 두어 무비판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타인이 축적한 지식에서 찾는 무의미한 행위이다. ‘독서광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느낀 점이 있다. 행동을 하는데 있어 나 자신의 머리로 생각한 것을 기반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투자를 하는데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나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독서광의 모습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구토 챕터에서 작가는 인간의 삶은 철학자들이 본질이라고 부르는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삶을 매순간 선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체적인 삶을 위해 꼭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인상 깊게 읽은 챕터는 위 두 챕터였지만 이 외에도 파우스트, 변신, 멋진 신세계 등 다양한 문학 작품을 철학적 관점에서 재미있게 해석하였다. 철학에 재미있게 입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꼭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국내도서
저자 : 김용규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200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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