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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이전/지식 불리기

원유 투자 기본서 -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최지웅 저) (2)

이 내용을 읽기 전에 먼저 이전 글을 읽고 보시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2020/04/07 - [지식 불리기] - 원유 투자 기본서 -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최지웅 저) (1)

 

원유 투자 기본서 -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최지웅 저) (1)

우선 책 전반을 보면 1~3장은 원유 시장의 역사에 대해서 잘 서술하고 있어서 원유 시장에 입문하시는 분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하지만 4장부터는 작가 분의 사견이 많아지고, 원유 관련 내용보다는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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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 OPEC의 탄생

OPEC 형성 이전까지는 세븐 시스터즈라고 불리는 7개의 회사들이 석유 산업을 지배했습니다. 이 중 2개는 영국 기업이었고, 5개는 미국 기업이었습니다 (Anglo-Iranian Oil Company – 지금은 BP, Royal Dutch Shell, Standard Oil Company of California – 지금은 Chevron, Gulf Oil - Chevron으로 합병, Texaco - Chevron으로 합병, Standard Oil Company of New Jersey - Exxon으로 사명 변경했다가 Exxon Mobil이 됨, Standard Oil Company of New York – Mobil로 사명 변경했다가 Exxon Mobil로 합병).

당시만 해도 세븐 시스터즈가 일방적으로 원유 공시 가격을 결정했습니다. 때문에 원유 가격에 따라 수익 배분을 받는 산유국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세븐 시스터즈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키우기 위하여 산유국들도 단체를 결성하기로 하는데, 그게 바로 OPEC이었습니다. 당시 베네수엘라 석유 장관인 후안 페레즈 알폰조와 사우디 초대 석유 장관 압둘라 타리키가 협력하고 3개국이 더 동참하여 19609OPEC이 결성되는데, 창설 멤버는 사우디 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였습니다.

지금은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OPEC이지만 초기에는 OPEC의 영향력은 미미했습니다. 이는 아래 3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 케네디가 중남미 경제 원조하면서 베네수엘라가 주요 수혜국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반미 정서가 약해지면서 OPEC에 적극 참여할 동기가 사라지게 됩니다. 2) 사우디와 이란은 수니파와 시아파 갈등으로 사이가 좋지 않아 협조가 제대로 안 되었습니다. 3) 산유국들이 석유 개발에 필요한 자본, 기술, 판매 채널을 모두 세븐 시스터즈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세븐 시스터즈에 대한 협상력이 떨어졌습니다.

이후 OPEC이 지금처럼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사우디의 2대 석유 장관이자 24년 동안 자리를 지킨 자키 아마니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후 중동전쟁, 1, 2차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OPEC은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중동 전쟁

중동 전쟁은 총 4차례에 걸쳐서 발발하였습니다. 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발발하였습니다. 2차 중동전쟁은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두고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 간에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이집트가 승리하면서 마무리됩니다. 3차 중동전쟁은 2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집트 나세르를 중심으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군의 선제 타격으로 이스라엘이 6일만에 압승을 거둡니다.

4차 중동전쟁은 1973년에 발생하는데 이 때 1차 오일쇼크가 옵니다. 중동은 3차 중동전쟁에서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침공과 동시에 석유 감산 조치를 시행합니다. 1970년대는 일본, 한국 등의 석유 수요 급증으로 잉여 석유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중동 감산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아랍의 봄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아랍의 봄

 

1970년대 전반적인 상황

1970년대 원유 수요 증가로 잉여 석유가 사라지면서 게임의 판도가 변하게 됩니다. 일본 등 새로운 수요처가 급부상하면서 석유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2차 중동전쟁 때였던 1950년대만 해도 미국은 자국 수요를 모두 감당하고도 가동률을 10%가량 여유를 두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2차 중동전쟁 때 중동 석유 수입이 막혔을 때도 유럽 동맹국들에게 석유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가동률을 100%로 올리면서 잉여 물량이 소멸하게 됩니다.

잉여 물량 소멸로 아랍권의 석유 공급 중단은 공급 공백을 초래하는 상황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아랍 국가들은 세븐 시스터즈와의 분배율을 더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4차 중동전쟁 & 1차 오일쇼크

위와 같은 상황에서 19734차 중동전쟁으로 1차 오일쇼크가 옵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은 중동 연합군의 기습에 당해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동의 석유 감산 조치 때문에 중동의 눈치를 봐야해서 조금 늦게 이스라엘을 지원하였습니다. 결국 미국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이 승기를 잡기는 했지만, 사우디가 감산에 동참하고 소련이 전쟁 참여 의사를 보이면서 적당한 수준에서 휴전 협정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배럴 당 3달러 수준의 유가는 12달러로 무려 4배나 급등합니다. 이 때 원유 수급으로 중동의 눈치를 보던 많은 국가들이 친아랍, 반이스라엘 성명 발표를 합니다. 원유 가격의 급등으로 미국의 GNP1973~1975 -6%를 기록하였고, 일본도 전후 처음으로 GNP가 감소하였습니다. 프랑스를 주축으로한 유럽, 일본, 한국 등이 친아랍 성명 발표를 하였고 19743월 석유 무기화가 대부분 종료됩니다.

 

아랍의 봄 & 2차 오일쇼크

1970년대 이란은 미국이 지지하는 팔레비 왕정의 지배하에 강제 서구화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반발을 삽니다. 여기에 더하여 오일머니 대부분이 왕가를 비롯한 소수계층에게 집중되면서 빈부격차가 커졌습니다. 팔레비 정부에 대한 반발로 시아파 지도자인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지지율이 높아졌습니다. 1977년 말 호메이니의 아들이 피살되는데 이 배후에 팔레비 왕가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이란 혁명이 시작됩니다. 19789월 수천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일어나고 전국으로 혁명이 퍼집니다. 이 때 이란이 석유 수출을 전면적으로 중단하면서 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합니다.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은 무너지고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집권하게 됩니다. 이후에 이란은 철저한 반미로 돌아서고 지금까지도 미국과는 적대, 미국과 대립하는 중국과는 협력노선으로 가고 있습니다.

2차 오일쇼크의 결과로 유가는 배럴당 13$에서 40$ 수준까지 급등합니다. 1979년 이란 혁명이 마무리되고 원유 수출을 재개했는데도 유가는 급등한 수준에서 유지되었습니다. 이는 에너지 안보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석유 수입국들이 필요 이상으로 석유 재고를 쌓기 시작하였고 유조선에 저장하기도 했습니다. 불확실성에 기인한 과도한 재고 축적으로 고유가가 유지되고 주요 산유국들은 원유 생산량을 늘립니다. 당시 고유가로 인하여 러시아와 멕시코만 등에서 새로운 유전도 개발됩니다.

당시 사우디 석유 장관인 자키 야마니는 석기 시대는 돌이 부족해져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석유 시대는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라고 말하며 저유가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했지만, 다른 중동국가들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이 때 과잉 CAPEX가 발생하고 되고, 1980년대 경기 침체로 원유 수요가 감소하게 되자 1986년 기록적인 유가 폭락이 나오게 됩니다.

 

1980년대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글을 통해서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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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1차 세계대전에서 금융 위기와 셰일 혁명까지 석유가 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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